2023. 2. 5. 20:10ㆍ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1. 청나라 초의 산문
청나라 초의 대학자인 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황종의(黄宗義)는 후대에 사람들에게 청초의 삼대사(三大師)로 존경받으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의 문장관은 청대 산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성실한 학자로서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는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문장은 모두 쓸데없는 해로운 글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명대(明代)의 의고주의(擬古主義: 옛글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모방하기에 급급하던 풍조)도 반대하였지만, 성령파(性靈派)의 낭만주의적인 문장도 배격하였다. 심지어는 순수문학의 존재조차도 문학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이나 「정림문집(亭林文集)」에는 '문장이 세상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道)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정사(政事)를 기록하기 때문이요, 백성들의 실생활을 드러내기 때문이요, 사람들의 선한 정서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천하에 유익한 것이고 앞으로도 유익한 것이어서, 한 편의 글이 생겨나면 그만큼의 이익이 늘어난다. 하지만 괴상한 일, 싸우는 일, 어지러운 일, 귀신에 관한 일을 쓰거나, 터무니없는 얘기를 쓰는 일, 남의 얘기를 베끼거나, 아첨하는 글 같은 것은 작가 본인에게도 손해가 됨은 물론이요, 남에게도 유익하지 않아서, 한 편의 글이 생겨나면 그만큼의 손해가 늘어난다.'라며 그들의 문학관을 뚜렷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문학 이론 안에서는 민간의 통속적인 소설이나 희곡도 문학적으로 가치 없는 글이 되고 만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이란 고대 성인의 사상과 이치가 담긴 글로,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올바로 이끌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풍토 아래에서는 다양한 문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옛날부터 산문의 대가로는 이른바 '삼대가(三大家)'라 하여 후방역(侯方域)·위희(魏禧)·왕완(汪琬)의 세 사람을 쳐 왔다. 이들은 대체로 과거 한유(韓悠)와 구양수(毆陽修)의 문장과 같은 고문을 지어 명나라 말엽에 유행했던 소품문(小品文)의 풍조를 바꿔놓기도 했다.
2. 동성파(桐城波) 고문
청대의 산문은 안휘(安徽) 지역을 중심으로 강희(康熙) 말엽부터 건륭(乾隆) 초기에 걸쳐 방포(方苞)·육대괴(劉大鹏)·요내(姚鼐)로 이루어진 '동성파'의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동성파의 문장은 건륭 연간은 물론이고 그 위세는 청 말엽까지 미쳤다. 동성파의 문장이란 청나라 초기의 고염무(顧炎武)를 비롯한 대학자들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을 문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방포(方苞)는 동성파의 창설자로 동성파의 대가인 그의 문장론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이 있다. 첫째, 문장가는 문인인 동시에 성인(聖人)이어야 한다. 당나라 유명 문단인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글을 잘 지었지만 그들의 문장은 유교의 사상적인 근거가 약하고, 도를 충분히 담고 있지도 못하다. 그는 글, 또는 작가와 성인의 일체화를 문장의 최고경지로 여겼다. 둘째, 그는 의법(義法)을 매우 중시했다. 그가 말하는 '의법'은 유교의 도의(道義)를 뜻한다. 셋째, 그들이 생각하는 문장의 최고 규범은 육경과 「논어」·「맹자」이며, 다음이 「좌전」·「사기」며, 그다음이 '당송팔대가'이고, 명대에 있어서는 귀유광(歸有光)을 높이 평가했다. 넷째, 그는 고문과 시·사·부 같은 순수문학을 엄격히 구별하고, 소설·희곡은 더욱 경시했다. 다섯째,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문장은 우아하고 깨끗하거나, 담백하면서도 물 흐르듯 순조로워야 한다. 따라서 불교나 송대 성리학자들이 자주 썼던 어록체(語錄體)는 물론이고 변문(騈文)에 쓰이는 화려한 수식, 부(賦)에 쓰이는 무겁고 두루뭉술한 표현, 시에 쓰이는 재치 있는 가벼운 표현,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경박하고 속된 말 같은 것은 철저히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동성파의 이론은 그 자체로 적잖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러한 문장의 이상은 도저히 실현될 수도 없으며 다양한 문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후세에 방포를 포함한 동성파의 문장이 용어가 빈약하고, 문장으로서의 맛이 없고 오로지 이치에 맞고 바르기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후에 전대흔(錢大昕)이 '법(法)도 모르는데 의(義)는 과연 있다고 하겠는가(法且不知, 義於何有)'라고 공격하고, 왕약림(王若霖)이 '고문으로 시문(時文)을 삼고, 시문으로 고문을 삼고 있다(以古文爲時文, 以時文爲古文)'고 평가하고 있는 것은 동성파가 심각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의미 있는 비판이다.
3. 변문파(駢文派)
동성파의 고문운동은 청대의 산문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복고의 흐름이 뚜렷했던 시기였던 만큼 '변문'의 문장도 대단히 유행했다. 청초에 진유숭(陳維崧)이 맨 먼저 변문에 앞장섰고, 오기(吳綺)·육번초(陸繁弨)·모기령(毛奇齡)·장조공(章藻功) 등이 그 뒤를 계승했다. 진유숭은 그는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변려문의 대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호해루전집(湖海樓全集)」에는 변려문으로 쓴 변체문(駢禮文) 6권이 있고, 그를 뒤이어 「임혜당집(林蕙堂集)」을 남긴 오기(吳綸)와 육번초(陸繁弨) 역시 좋은 변문을 남기고 있다. 그 뒤 건륭 연간부터 1850년까지는 변문이 고문과 대비하여 가장 성행했던 기간이다. 이 시기엔 이른바 '변문팔대가(駢文八大家)'가 나왔는데, 원매(袁枚)·손성연 (孫星衍)·오석기(吳錫麒)·홍양길(洪亮吉)·유성위(劉星煒)·소제도(邵齊燾)·증욱(曾燠)·공광삼(孔廣森) 등이다. 완원(阮元)의 제자인 오기(吳綺)가 편찬한 「국조팔가사륙문초(國朝八家四六文鈔)」에는 이들의 작품이 들어있다. 변문팔대가 중에서도 특히 홍양길과 공광삼이 특히 뛰어났다. 공광삼은 대진(戴震)의 제자이자 「삼례(三禮)」와 「공양춘추(公羊春秋)」 연구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변문도 단순히 문장의 수식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사물의 표현이 뚜렷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대에 최후로 변문을 크게 유행하게 한 사람의 완원(沅元)이 있다. 그는 젊어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후 86세의 노령에 이르기까지 학문연구에 종사하여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황청경해(空結經解)」 등의 대저술을 남겼다. 그는 옛 문인들의 문필(文筆)을 구분하여, 아름답게 표현한 글은 문(文)이고, 실용적인 글은 필(筆)이라 구분했다. 따라서 육경이나 학술적인 문장은 문학으로서의 산문이 아니며, 변문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 주장한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학식을 지닌 사람이어서 그의 이론은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실용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을 구분하려 한 시도는 좋았으나, 산문에 있어서 순수문학 가치를 변문에서 구하려 한 것은 아무래도 시대착오였다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대(淸代) 시대적 배경과 문학 (0) | 2023.02.03 |
---|---|
영토적 특징과 중국문학의 관련성 (0) | 2023.02.02 |
명나라 오대전기(五大傳記) 줄거리와 문학적 의의 (0) | 2023.02.01 |
명대(明代) 다섯 가지 전기(傳記) (0) | 2023.01.29 |
명대(明代) 4대 장편소설 (0) | 2023.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