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唐代)문학 (4) - 만당(晩唐)

2023. 1. 23. 17:00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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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당(晩唐), 파국의 시대

   만당(晩唐)은 당 제국의 사회 전반이 혼란스러워져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던 시대였다. 중당 시기에 진행되었던 문학개혁운동은 그 기세가 약간 수그러진 듯한 느낌은 주지만 사실상 거의 그대로 만당까지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시에서는 맹교(孟郊)나 한유(韓愈)처럼 개성적이고도 톡톡 튀는 듯한 표현을 추구하던 시풍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작가가 있는가 하면, 현실주의적인 시풍을 계승하여 어지러운 그 시대의 사회적인 모순을 고발하고 시대와 당면한 현실 문제와 싸움하던 작가들도 있었다. 다만 어지러운 세상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가치관에도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되어 문제의식이 중당 시기의 문인들처럼 철저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어지러운 세상에 지쳐 문인으로서 뜻을 잃고 자신의 뜻을 올바로 추구하지 못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만당 때의 시가를 문학 창작이 후퇴한 시기, 또는 문장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유미주의의 시기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만당 시기는 중당 때의 사회문화적 개혁운동을 이어받아 그 맥을 유지하며 이후 송대에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공헌한 시기라고 봐야 한다. 이 시기에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시인은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店)이다. 두목은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포부를 갖고 한 때 전쟁 및 정치에 관한 정론문도 썼으나, 술과 여인을 즐기는 퇴폐적인 생활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그를 흔히 '풍류재자'라고도 부르는데, 그의 시는 개성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멋있는 표현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대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지식인의 현실주의적인 작품도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 시형에 있어서는 7언 율시와 사언절구를 잘 지었는데, 특히 7언 율시는 두보의 전성기 때 작품들과 비슷하여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소두(小杜)라고도 불렀다. 이 외에, 정치와 사회의 부패와 혼란을 보고 분노하여 끊임없이 정치·사회의 문제들을 주목하며 그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서 노래한 현실주의적인 작가들로는 섭이중(攝夷中)·피일휴(皮日休)·두순학(杜荀鶴)이 있다. 중당 때에는 백거이와 원진과 대적할 만한 대가는 없었지만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시를 쓴 작가가 꽤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시를 짓는데 지나치게 형식을 꾸미고 중시하는 옛 중국 문학자들의 전통과 만당 때에 새로 발전한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한 문인들의 작품들 때문에 빛을 보지는 못하였다.

 

 

2. 반(反)변려문을 추구한 당대 산문

  중국의 문장은 한(漢) 나라 이후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형식과 수사를 중시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번려문(駢儷文)이라는 극도의 미학을 추구하는 문체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당나라에 들어와서도 변려문 풍조는 더욱 성행하여 문학 전반에 걸쳐 문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시에서도 변려문은 귀족적인 것, 사회지도층의 문장이자 유미주의 문학풍조의 대표가 되었다. 변려문의 특징은 대체로 한 문장이 네 자와 여섯 자로 구성되며, 대구를 많이 쓰고, 중국어가 가진 성조를 최대한 아름답게 살린 음조를 강조했다. 따라서 글의 내용과 표현보다도 아름답고 멋진 글 자체가 더 중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장의 실용과 글의 역할을 중시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그러한 변려문의 성격을 비판한 이들이 있었다. 양(梁) 나라의 배자야(裵子野)는 '당시에 성행한 글들은 음문파전(淫文破典)으로서 화려한 표현만을 껍데기로 삼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북조에서도 소작(蘇綽)이 문체 개혁을 주장하였고, 수(隋) 나라 문제(文帝) 또한 공과 사의 문서는 모두 실질적인 기록을 하는 문체를 쓰도록 하라고 공포하였다. 이에 맞추어 인악(李諤)은 황제에게 당시의 문장이 화려함만을 추구하고 경박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데에 해가 되고 있음을 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문까지도 변려체인 것을 보면 이들 비판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변려문과 반대되는 풍격의 고문을 지지해 온 세력으로는 역사가, 종교자, 소설가라는 세 종류의 세력이 있었다. 유교나 불교·도교처럼 종교적으로 자기들 교리를 논하거나 교리를 널리 민중에게 선전하는 글은 화려한 형식을 위주로 하는 수가 없다. 자세히 서술하거나 사실을 정확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글이 말하고자 하는 착실한 뜻에 주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불경 번역으로 많이 읽히게 된 불경 고사는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것도 적지 않아서 소설 문장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성행한 지괴(志怪)는 당나라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을 이끈 문학이라 할 수 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얘기의 내용을 적어야 하므로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하고도 경제적인 문체이어야만 한다. 전기소설 작가 중에는 고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전기 고문운동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문학의 노신(魯迅)이 그의 「중국소설사락(中國小說史略)」에서 이러한 종류의 글은 당시 대체로 편폭이 길고 상세하며 가끔은 우스갯소리와도 비슷했기 때문에 이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 비판하고, 그것을 비하하여 낮추어 '전기'라 부르면서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같은 이들의 글과 구분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전기(傳奇)'는 노신이 말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고상한 글이 못 된다고 생각되어, 중국 문학자들은 한유와 유종원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고문운동을 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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