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3. 23:50ㆍ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1. 송나라 초기 산문의 특징
송 초 때에도 고문은 상당한 수준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문장의 아름다운 수사에 힘쓴 서곤체와 변려체를 짓는 문인들이 그 명맥을 여전히 이어가는 반면, 구준(寇準)· 위야(魏野)·왕우칭(王禹偁)· 임포(林逋) 등이 서곤체나 변려체와는 다른 솔직하고 청신한 시를 지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고문을 쓸 것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이어 목수(穆修)·윤수(尹洙) 범중엄(范仲淹) 같은 사람들이 고문을 내세웠다. 이들은 '문장이란 도를 잡아 담는 통발과 같은 것이니, 통발을 과연 함부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통발이 좋지 않으면 잡았던 것도 잃게 된다. 글이란 내용인 이치보다도 표현이 화려한 게 나쁜 것이지, 이치가 표현보다 화려한 것은 나쁘지 않다.'라고 하면서 문장에는 도(道)가 담겨 있어야만 하고, 글이란 논리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문론은 중당 시기 한유의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도학적인 성격을 가진 다른 문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이란 도의 쓰임이다(文者道之用也)'고 하면서 송대 고문론의 요점을 '문장이란 도를 밝히기 위한 수단이며 인의(仁義)의 교화를 위한 효용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이 유미주의적인 서곤체와 변려문을 반대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송대에 와서 특히 당나라 한유에 대한 숭상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명도치용론(明道治用論, 道를 사용하여 세상을 다스린다) 때문일 것이다. 석개(石介)는 '공자가 성인으로서 위대한 분이라면, 한유는 현명한 문인으로서 위대한 분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야 세상에 다시 공자가 나올지 알 수 없고, 또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야 다시 한유가 나올지 알 수 없다.'라고 한유를 추앙하고 있다. 이러한 한유에 대한 존경심은 사상적으로는 유학의 도통론(道統論)을 높이 산 이유 때문이고, 문학적으로는 고문운동을 세우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유에 대한 존중은 송나라 전 시기를 통하여 산문뿐만이 아니라 시에서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들은 '당(唐) 대의 문장은 처음에는 그 기풍이 보잘것없고 껍데기뿐인 기풍에서 떠나지 못하였는데, 중간에 이백·두보의 등장으로 비로소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한유가 나온 이후에야 고인의 문장을 크게 써낼 수 있어서, 그들의 말과 뜻이 서로 꽃과 열매처럼 어울려 천하거나 잡되지 않게 하였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고문운동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중국 산문의 주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송나라에는 조정의 공문이나 사대부들 사이의 편지 및 상소문에서는 여전히 글의 형식을 중시하는 문장이 쓰였다. 고문운동과 변려문이라는 대조성이 오히려 그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2. 구양수와 고문운동
이처럼 담백하고 간결한 글을 짓고자 하는 고문운동이 성행하였음에도, 세상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유미주의의 기풍을 완벽히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고문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이상하고 유난을 떠는 사람으로 여기는 풍조도 없지 않았다. 구양수(歐陽修)는 이러한 풍조를 바로잡고 고문운동을 완성시킨 인물로서, 지금까지의 문풍을 바로잡은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구양수는 고문뿐만이 아니라 시·사(謝)에 있어서까지도 송대의 개성 있는 문학을 이룩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이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창작을 통해서도 고문의 순박한 아름다움을 증명하였다. 구양수는 '뜻이 순수하면 속이 알차게 차 그 자체로 충실하고, 뜻이 충실하면 문장 그 자체로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하였다. 도가 본질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뜻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형식을 갖추면 더욱 빛을 발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고문의 대가이면서 동시에 시·사·부와 화려함과 유미주의 문장인 사륙문에 있어서까지도 그 시대의 최고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문학론에 찬성하건 하지 않건 간에 모두가 그의 문학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도 그의 작품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 시대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구양수는 일찍이 고문가인 윤수(尹洙)와 시인 매요신(海堯臣)과 교류하며 문학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고, 후에 정계에 등용되어 과거를 관장하면서 소박하고 간결한 고문으로 답안을 쓴 이들만을 뽑고 알갱이 없이 화려하기만 하거나 생활 속에 잘 쓰지 않는 기이한 표현에만 힘쓴 글들은 모두 낙제시켰다. 왕안석(王安石), 소식(妹軾) 같은 자들이 바로 구양수가 이러한 방침에 따라 뽑힌 사람들이었다. 구양수는 이처럼 그 시대의 정치적·학술적 스승이면서 문단의 전반적인 지위를 확보하였기 때문에, 각 방면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많은 대가들을 배출하여 고문운동을 완성하고 송대의 문학을 개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구양수를 뒤이어 송대 육대가(六大家)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 고문운동을 한층 발전시키고, 한유·유종원과 함께 고문의 상송팔대가(唐朱八大家)라 불리게 된다. 다만 이들 여섯 명의 문장 풍격은 각기 차이가 있다. 중공(會我)의 글은 표현이 정확하고 논리에 빈틈이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소순(蘇洵)의 글은 고고하고 간단하다. 소식(蘇軾)의 글은 여러 가지로 모습을 변화하여 지루할 틈이 없다. 이처럼 같은 문학의 풍격을 중시하면서도 각자 서로의 개성을 담은 고문을 통해서 고문운동은 완성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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