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唐代)의 문학 (3) - 중당(中唐)

2023. 1. 23. 14:50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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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당(中唐), 상반된 문학의 발전

  중당(756-835)은 안사(安史)의 난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당제국이 한순간에 파괴되어 혼란에 빠진 끝에,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문학에 있어서 모든 시인들은 더 가까이 민중의 생활과 감정에 다가가고, 또 그 시대 사회문제를 현실주의적으로 추구하면서 작가로서의 새로운 자아를 찾아간 시대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시인들이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민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개성적인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였다. 민간 가요의 형식을 채택한 새로운 형식의 시가인 사(詞)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산문에 있어서는 아름다움과 형식미를 추구하는 글을 반대하고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정서에 집중하는 고문(古文)을 쓰자는 '고문운동'이 시작되었다. 또한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노래 형식의 변문(變文)이 유행했으며, 그러한 설화(說話)와 속강(俗講)의 영향을 받아 전기소설(傳奇小說)도 유행하였다. 그러니 중당시기는 중국문학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안사의 난 때문에 귀족과 황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회 전반이 질서가 무너지면서, 지식인들이 민중의 위대한 저력을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당시기의 개혁운동은 두보(杜甫)에 의하여 불 지펴진다. 그리고 잠참(岑參)과 고적(高適)이 또 다른 각도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두보는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냉정하고 비정한 현실에 대하여 눈뜨게 되고,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작가로서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를 통해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시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를 짓는데, 내용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시의 언어에 있어 서도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는다고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 (語不驚人 死不休)'고 하면서 시에 개성적인 표현을 담는 노력 하였다. 그 결과 앞선 성당 때의 시풍과도 다른 새로운 중국시의 세계를 열게 되었다. 잠참과 고적은 이미 성당 때에 옛 악부의 정신을 이어받고 전쟁이 잦은 국경 변방지대의 처절한 풍경과 특수한 상황을 노래했던 '변새파'의 시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는 성당 때의 변새파보다도 더욱 냉정한 태도로 현실을 반영하여, 새로운 중당의 시풍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두보와 비슷한 취향의 작가들이 모여 '신악부운동(新樂賦運動)'을 주장하며 서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평이한 용어로 백성들의 정서를 이해하며 새로운 경향의 시를 짓게 된다.

 

2. 개혁운동의 선구자 두보(杜甫)

  성당 시대의 이백과 함께 병칭되는 또 다른 위대한 시인이 뒤이어 중당에 탄생했으니 바로 두보이다. 흔히 '이·두'로 함께 불리게 되지만 이백의 성격이 감정적이고 자유분방한데 비하여 두보는 유가적인 윤리관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착실하게 살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당시기에 당 제국의 호화로웠던 생활을 바탕으로 발전한 낭만주의적 시 창작의 바탕 위에 현실주의적인 감각을 추가하여 전보다 새로운 차원의 문학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두보의 전 생애를 통한 가난한 생활과 안록산의 난을 전후한 시기의 사회적인 대혼란은 그의 문학이 왜 현실주의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떻든 보통 이백을 시선(詩仙),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두 시인의 성격과 문학풍조의 차이를 잘 말해준다. 시형에 있어서도 두보는 격율을 엄격히 따져 쓰는 '율시'를 잘 지었다. 그 이유 또한 성실하고 도덕적인 그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두보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탁월하여 십여 세에는 유명한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였고, 20세 무렵까지 가난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24세 때에는 장안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다시 지방 일대를 유랑하였다. 그러나 두보는 이 시기에 이백과 고적 같은  낭만적 시인들을 만나 사귀었는데, 이 무렵에는 그도 성격이 자유분방하였고, 작품도 이후 두보의 작품과는 달리 낭만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는 긴 시간을 유랑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과거에 실패하고 8, 9년을 장안에 머물면서 벼슬을 해보려고 황제와 고관들에게 글을 올리며 백방으로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을 더욱 곤궁해졌다. 그가 체험한 개인적인 고난과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지 못한 정치적·사회적 여러 가지 모순은 그의 시를 현실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말았다. 조정과 귀족들의 사치를 보고 「자경부봉선(自京赴奉先)」· 「최시가 (醉時歌)」 등을 지었고, 양귀비 자매들의 호화롭고 허영심 가득한 생활을 보고는 「여인행(䰟人 行)」을 지다. 농촌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고는 「추우탄(秋雨嘆)」을 지었으며, 전 지역에서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고는 「병거행(兵車行)」을 지었다. 오랜 곤궁과 어린 자식이 굶어 죽는 개인적인 비참한 경험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사회의 모순을 직접 체험한 끝에 두보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는 내용도 풍부하고 변화도 단조로움 없이 다양하다. 예부터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 하였는데, <시경>에서부터 중국 사람들은 시의 가장 역할로 사회적인 모순을 고발하고 통치자들의 잘못을 꼬집고 여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두보의 시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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