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와 건안문학

2023. 1. 21. 08:10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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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진남북조 시대적 특징

  이 시대는 실제로 위(魏) 나라 조조(曹操)가 천하의 권력을  잡았던 동한 말부터 시작한다. 동한은 말엽으로 갈수록 왕족들의 부패한 생활, 외척·환관과 관료들 사이의 심한 세력 다툼과 갈등으로 정치와 경제가 극도로 혼란하여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 빠져 있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은 이러한 백성들의 고난이 심화되어 터진 것이고, 또 이것은 한나라의 수명이 곧 다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건안(建安) 13년에 이르는 19년 동안에는 단 하루도 전쟁 없이 고요한 날이 없어, 황하 유역 일대에는 모든 생활지가 크게 파괴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건안 13년 유명한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적벽대첩 이후에는 나라가 조조(曹操)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 손권(孫權)의 오(吳) 나라 삼국 체계로 갈라졌다. 이들은 서로 싸우는 와중에도 국력을 길러 위나라는 황하 유역의 농업 생산을 상당히 회복시켰고, 촉나라는 중국의 서남 지역을, 오나라는 동남 지역을 개발하는 공헌을 이루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위나라를 찬탈한 서진(西晋)이 서기 280년에 전국을 통일한다. 이 시기의 문학을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 부른다. 동한 중엽 사회적 문제와 책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지식인과 문학의 개성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했던 문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대 민가의 내용과 오언의 형식을 발전시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펼친 시기이다. 이 건안문학은 조조(曹操) 삼부자와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가 앞장섰고, 내용은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서진(西晋)은 한 때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정치/사회면에 있어서의 귀족과 외척들의 지위가 굳어지고, 자기네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극도로 부패한 생활을 하였다. 서진은 귀족들의 힘을 빌려 정권을 휘어잡고 황족들의 힘을 이용하여 천하를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제왕(諸王)으로 봉했다. 그 결과 십여 년 만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고, 곧바로 각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들고일어나 서로 싸우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은 망해버렸다. 그러나 서진의 일파가 강남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고 이른바 동진(東晋)이고도 불리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전개된다. 위나라부터 서진시대까지 이어진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지식인들은 현실적인 뜻을 잃고 동한 때에 이룩된 도교를 발전시키며 약을 먹고 신선이 되기를 추구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현실에 뜻을 두지 않고, 초연하고도 거리낌 없는 태도를 일관하며 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정치의 영향을 받아 문학까지도 완전히 귀족들의 것으로 굳어져서 귀족화하고 형식화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미가 뚜렷한 좌사(左思)의 「영사시(詠史詩)」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주류를 벗어난 의미 있는 시로 지금도 그 의미가 깊다.

 

 

2. 어지러운 시대와 상반된 문학 풍조

  남북조시대에는 도교와 함께 동한 때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불교가 성행하였다. 불교의 윤회사상(사람이 죽으면 다시 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사상)과 인과응보(자신의 업보에 따라 복과 벌을 받는다는 사상)의 이론은 사회 혼란 속에 고통을 당하던 그때 사람들에게는 큰 정신적인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교와 불교의 성행은 현실사회를 외면하고 초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내용에 있어서도 문학으로서의 성실성을 잃고 형식주의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문장에 있어서 더욱 형식미를 중시하고 대우(對偶)를 추구하며 극도의 함축적인 표현을 추구하여, 내용은 아랑곳없이 무엇보다 아름답고 멋진 글을 쓰는 것에 힘썼다. 이 시대에는 오언시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이 전개되었고 또 오언시를 짓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고 성숙해져서 이 시기의 오언시는 가장 대표적인 문학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성율을 중시하고 형식미를 추구하여 고시에서 근체시(近體詩)의 시율(詩律)을 발전시킴으로써 당(唐) 대에 화려하게 꽃 피운 율시(律詩)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위(魏)· 진(晋) 대에 이르러 서정적인 짧은 부로 청신한 맛을 보여주던 부(賦)도 대우와 수사미를 중시하면서 변부(駢賦)를 발전했다. 산문에 있어서도 대우가 중시되고 산문 속 문장의 성조까지도 신경을 써서 변려문(骈驪文)이라는 극도로 글 쓰는 기교를 다 한 문체를 발전시켰다. 한 마디로 이 시대는 문장의 형식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형식주의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시(田園詩)와 사령운(謝靈運)의 산수시(山水詩) 등은 이러한 시대적 문학 풍조와 다른 중국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한대 악부 민가는 그대로 전통이 계승되어,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라는 유명한 장편 서사시가 나왔고, 남조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을 주제로 한 짧은 노래들이 유행하였으며, 북조에서는 애정뿐만이 아니라 전쟁이나 백성들의 생계와 같은 현실 문제를 노래한 작품들도 전해지고 있다. 소설에 있어서는 이른바 지괴소설(志怪小說)이 유행했다. 그리고 당시 성행했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많은 불경이 중국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이 시대의 문학 풍조와는 다르게 문장의 꾸밈은 멀리하고 그 뜻을 착실히 표현하는 데 힘썼다. 불경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불교에 관한 이야기들은 중국 소설의 발전을 자극하는 새로운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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