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5. 21:20ㆍ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1. 명대(明代)의 시대 배경
명나라 태조(太祖)가 된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에 몽고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남경(南京)에 한족의 새로운 왕조인 명(明) 나라를 세웠다. 태조는 건국을 이루고 나서 곧바로 그동안 국토를 개척하며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사회를 재건하기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여러 가지 몽고풍의 제도와 오랜 풍습 등을 없애고 한족의 문화를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는 데 힘썼다. 지역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한족으로 이루어진 관료를 뽑음으로써 몽고의 흔적을 없애고자 했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 학문의 부흥에 힘썼다.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옮긴 성조(成祖) 시기에는 관료들에게 명령하여 「오경대전(五經大全)」과 「사서대전(四書大全)」 등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또 2,100여 명의 문인과 학자들을 동원하여「영락대전(永樂大全)」 2만여 권을 편집하도록 하였다. 이는 옛 자기네 뿌리와 문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연스럽게 명나라 때의 학술과 문화에는 복고주의(復古主義)적 경향이 매우 짙게 나타난다. 명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통제하에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였고, 이에 따라 상공업과 수공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특히 제철과 조선업이 상당히 발전했고, 요업 같은 수공업은 특히 공장 규모와 기술이 발전하였는데 역사상 중국의 자본주의의 시작을 이 시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상공업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번영을 가져와, 명나라 초기 남경이란 지역의 인구는 이미 백만이 넘었고 북경의 인구도 60여만이었다. 이 밖에도 전국에 상업 도시가 셀 수 없이 나타나고 발전하였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시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시민 의식이 이루어져, 명대에는 이들 시민의 요구를 담은 장편 '장회소설(章回小説)'과 장편 희극인 '전기(傳奇)'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민간연예가 성행하였다.
한편 상업의 발전은 부의 양극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소수의 지주가 많은 토지를 독점하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이에 토지를 잃은 농민 대부분은 유민이 되어, 마침내는 전국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명나라 말엽에 오면서 정치는 더욱 부패하였고, 외족의 침입은 갈수록 잦아져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황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명나라는 막을 내린다.
2. 명대의 문학 개황
명나라는 원(元)의 흔적을 지우고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통치를 하고, 또 후에는 만주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는 혼란한 역사의 틈에서도 과거시험에서 팔고문(八股文)을 사용하고 그 철학 사상을 계속해서 중시하며 명나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중시한 '팔고문(八古文)'이란 문장의 구성 형식과 내용, 심지어는 글자 수까지도 정해진 규칙과 격식이 있고, 문장 전체가 상·하·좌·우의 대구로 이루어지는 문체를 말한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극도로 형식적인 문장을 공부해야만 했고, 이러한 이유로 당시 지식인의 문장이나 시·사는 모두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 대에 들어와서도 중요한 가치로 숭상한 주자학(朱子學)은 이러한 형식적인 문학 풍조를 뒷받침했다. 외족의 침략을 받아 과거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적 있는 역사와 문화, 학술을 만회하기 위해 문학에도 민족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주의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전칠자(前七子)' 7명과 '후칠자(後七子)' 7명으로 대표되는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전후칠자(前後七子)의 대표인 이몽양(李夢陽)은 그의 글 속에서 '문장은 반드시 진나라와 한나라, 시는 반드시 성당(成唐) 시기를 따라야 하며, 여기서 어긋나는 것은 올바른 도(道)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내 일찍이 민간의 음악을 들어보았는데, 그 곡조는 오랑캐의 것이었고 생각은 음란하며 소리는 구슬프고 가락은 유치하다. 이것은 오랑캐의 음악이니 과연 그것이 참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나라마다 노래가 모두 달랐는데, 이것은 곧 민족의 풍속을 따라 곡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풍속이 오랑캐의 것과 같다면 그 곡조는 과연 오랑캐의 것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라며 적시하고 있다. 이렇게 진나라와 한나라의 문장을 주장하며 이 시기로의 문장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옛사람의 문학을 그대로 본뜨는 경향으로 흘러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문학을 중심으로 명나라의 정통문학은 형식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모방과 표절이 만행했고, 시대상이나 작자의 개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왕수인(王守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면서, 주자학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왕간(王艮)이 이른바 태주학파(本州學派))를 만들면서 더욱 자유로운 방법으로 학문을 추구하려는 주장이 제기되자, 명나라 말엽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를 반대하면서 작가의 개성적인 문학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마침내 '공안파(公安派)'와 '경릉파(竞陵派)'의 문학 개량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상선과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해운업이 달하여 세계관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도 이 시대의 두드리진 특징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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