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元代) 전기와 후기의 산곡(㪚曲)

2023. 1. 25. 20:00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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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곡사대가'와 전기 문학

  원나라 전기의 '산곡'은 <원곡사대가>중에서도 주로 관한경·백박·마치원의 세 사람이 대표적 작가로 꼽히며, 여기에 왕실보를 함께 포함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잡극이라는 장르에 두드러진 대작을 남기고 있다. 관한경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산곡인 「불복로(不伏老)」에 의하면, 그는 온갖 예능에 정통하여 주색과 가무를 즐기며 일생을 보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마치 북송 때의 유영(柳永)과 비슷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그의 소령(小令)은 민중의 생활언어인 백화체로서 남녀의 은은한 정을 가볍고도 솔직하게 노래한 것이 많았는데, 이는 그의 이러한 생활환경으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관한경의 투수(套數)에서는 좀 더 정돈된 아름다운 글로 발전하고 있는데, 글의 분위기가 생기 있고 자연스러운 점은 소령과 같다. 백박은 금나라에서 벼슬하다 원나라로 넘어와서는 자연 속에 조용히 숨어 살던 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백화(白華)는 금나라의 고관이었고, 일찍부터 원호문으로부터 문장을 배워 곡 작가들 중에서도 학문이 가장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원호문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그는 곡(曲)뿐만 아니라 시와 사에 있어서도 원호문과 그 풍격이 비슷하다. 그래서 그의 산곡 또한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멋은 있으나 관한경의 작품 같은 천속한 재미나 거침없는 기분은 느낄 수 없다. 곧 그의 학문이 산곡까지도 영향을 미쳐 그 풍격을 우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치원도 지방에서 벼슬을 지냈다는 것 이외엔 생애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그의 산곡을 보면 훌륭한 집안에 태어난 인재였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울분에서 오는 비분을 거침없이 서술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산곡사(中國散曲史)」에서는 백박과 관한경을 청려파(淸麗派)라 이름 짓고, 마치원은 호방파(豪放派)라고 구분하면서 마치원을 호방파의 우두머리로 치고 있다. 마치원은 그의 말년에는 다시 현실에 초연하여 한적함을 추구하며 작품의 의미를 더욱 확대했다. 그로 인해 백박의 작품처럼 청아하고 세밀한 작품도 있다. 원나라 전기의 산곡은 호방파가 주도했다는 점과, 마치원이 산곡이라는 장르를 중국 전통문학의 장르인 시와 사(詞)에 대등한 문장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 산곡 역사상 마치원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문인에 의한 후기 문학

 원나라가 통일을 한 뒤 두드러지는 현상은 전통적인 고전문학의 소양을 잘 갖춘 고관들이 산곡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 시대의 가장 정통적인 문인들이 산곡을 지었다는 것은, 이 무렵에 산곡이 새로운 문학의 주류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런 정통 문인들이 산곡 창작에 직접 참여하면서 산곡의 성격은 기존의 현실 속 저속한 내용을 거침없이 구어체로 써내던 이전의 성격과는 달리 우아한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기정의(寄征衣)」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을 소개한다.

 

빙난인(凭欄人)

님에게 옷 부쳐 드리자니 님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되고,

님의 옷 부쳐 드리지 않으려니 님 추우실까 걱정되네.

부쳐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몸 정말 어쩔 줄 모르겠네.

欲寄君衣君不還, 不寄君衣君又寒.

寄與不寄間, 妾身千萬難.

 

  남녀 사이의 은근한 정을 간접적으로 노래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품위가 있다. 이러한 아화(雅化)를 바탕으로 후기의 산곡은 본래의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성격에서 점점 벗어나 결국은 형식을 강조하는 유미주의적 성격의 문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산곡이 변화하는데 또 다른 큰 공헌을 한 사람은 관운석(賞雲石)이다. 그는 몽골인으로 한 때 고위 관료로서 나랏일을 하기도 했으나,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 살았다. 그는 몽골인이었지만 제대로 한(漢) 문화에 젖어 들어 완전히 중국인으로 문화적인 변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거침없고 생동감 넘치는 산곡도 지었지만, 관직을 버리고 자연 속 생활에 빠져들면서 그의 작품은 은근하면서도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풍격으로 발전하였다. 관운석의 글을 시작으로 곡의 운율을 중요시하며 형식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원나라 후기의 산곡 작가들이 나왔는데, 전기의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이 북방 사람이었던 것과 다르게 후기에는 남방지역 사람들이 산곡을 주도한 것도 원인 중 하나이다. 중국의 지역적 특징으로 북방과 남방의 생활환경, 자연환경이 크게 다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성향도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기의 산곡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교길(喬吉)과 장가구(張可久)가 있다. 교길은 본래 북쪽 지방의 사람이지만 후에 남쪽인 항주(杭州)로 거처를 옮겨 산 사람이다. 그는 정광조(鄭光祖)와 함께 '원곡육대가'의 한 사람으로 잡극에 재주가 뛰어났지만, 오히려 잡극보다도 산곡에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대표하는 원나라 후기 산곡은 전아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가끔 너무 지나치게 표현을 가다듬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원대 후기 산곡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은 장가구인데, 그는 낮은 벼슬을 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강 이남 일대의 산수를 떠돌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 많으며, 거의 온 힘을 다해 산골생활과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 표현이 아름답고 마치 직접 자연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동감 있기는 하지만 그 소재와 표현 방법이 한정적이고 변화가 적어 다양한 개성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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