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4. 22:23ㆍ중국문학사-그들의 세계속으로
1. 원대(元代) 문학의 배경
원(元) 나라는 약 160년에 걸쳐 중국을 지배했던 왕조이다. 몽고족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족으로 무력으로서 천하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예악이나 문화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민족이었다. 이런 억센 민족의 통치 아래에서 경제적인 번영에서 비롯된 사치와 오락을 누리던 한족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관원을 뽑는다든가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 첫째로 몽고인, 둘째는 색목인(色目人, 즉 서역이나 유럽사람들), 셋째 한인(漢人), 마지막 남인(南人)의 네 등급으로 사람을 구분하여 대우하였다. 이후 약 80년 동안 이과 같은 차별 대우가 행해졌으니 한족인 지식인들은 발붙일 곳이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유생은 그중에서도 가장 천시되었으니, 10등급으로 나눈 백성들 중 9등급에 속하는 아주 낮고 형편없는 존재였다. 이런 세상에 중국의 정통문학은 제대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고문과 시로 나름의 볼 만한 작품을 남긴 이들도 있었지만, 중국 문학 역사에서 평가할 말한 수준의 문인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원나라의 새로운 시가로는 송나라를 대신하여 북곡(北曲)을 바탕으로 한 산곡(散曲)이 흥행하게 된다. 북곡은 원래 북쪽 오랑캐의 노래와 민가에서 나온 노래였데, 중국을 지배하던 몽고인들은 북곡을 숭상하며 따라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북곡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송대에 새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연극인 희문(戱文)도 원나라로 들어오면서 잡곡(雜劇)으로 바뀌어 발전하게 된다. 중국 희극은 노래와 음이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이어서, 음악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다. 그리하여 산곡과 잡극으로 구성된 원곡(元曲)은 원나라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학 장르로 발전하게 된다.
산곡(散曲)은 청곡(清面)이라고도 부르며, 당나라와 오대 때의 소사(小詞)처럼 민간에 유행하던 짧은 구절의 소곡(小曲)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짧은 곡을 소령(小令)이라 하는데, 소령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소사(小詞)와 비슷한 점이 많다. 후에는 여기에서 더욱 발전하여 같은 궁조에 속하는 여러 개의 소령을 모아 한 조의 대곡(大曲)을 구성하고 이를 '투수(套數)라 불렀다. '투수'는 투곡(套曲)또는 대령(大令)이라고도 했는데, 3·4곡으로 된 짧은 것도 있지만 긴 투곡도 있었다. 이것은 서술적인 묘사 방법을 많이 쓰며, 복잡한 내용이나 고사를 노래하여 길이가 길고 지루한 형식이었다. 곡(曲)과 사(詞)는 모두 대중을 위한 민간 가요에서 발달한 것이고 형식과 내용이 모두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차이가 있다. 첫째, 두 가지 모두 자유형의 장단구(長短句)이긴 하지만 곡이 사보다 구절을 만드는 데에 변화가 많다. 곡(曲)에는 1·2 자구에서부터 한 구가 10글자가 넘는 것도 있고 구절마다 예외적으로 글자를 보태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 둘째, 곡(曲)에서는 압운이 매우 자연스러워져서, 중국어 성조와 발음을 구별 없이 압운한다. 이는 곡(曲)이 더 민간문학으로서의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셋째, 곡(曲)은 사(詞) 보다 더 통속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많이 쓰고 있다. 넷째, 초기의 사(詞)가 완만한 정서로 흐르며 뒤에는 고상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데 비하여, 곡(曲)은 우아함이나 속됨을 가리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일상과 감정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곡은 중국의 운문 중에서 내용과 형식을 막론하고 가장 변화가 많고 자연스러운 시가였다.
2. 원곡(元曲)의 등장
곡(曲)은 원래 민간에서 생겨나 기녀들이나 악공을 통해 구전으로 세상에 유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떼에는 작가로서 뜻을 잃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울분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산곡이나 잡극을 지었으므로, 전해지지 않거나 사라진 작품이나 작가조차 알 수 없게 된 작품이 많고, 작가의 이름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중민(任仲啟)의 「산곡개론(收曲槪論)」에 의하면 이 시기의 작가로서 이름을 남긴 사람의 수만 해도 227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의 생애를 보면 관리나 지식인에서부터 악공이나 기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당시 새로운 시가로서 산곡(㪚曲)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다.
원곡은 산곡(散曲)이나 잡극(雜劇)을 막론하고 원나라가 송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통일하였던 1279년을 기준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몽고의 시대라서 북방의 거칠고 직접적인 기질에다 민간문학으로서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시가이다. 따라서 전기의 산곡은 대개 소박하고도 활발하며 실제 민중의 언어가 섞인 표현 조차까지도 자연스럽게 썼다. 이 시기에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쓴 사람들도 있지만, 후기 때와는 달리 일부러 꾸미고 다듬은 흔적이 없이도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잡극도 그 문장 표현이 소박하고도 솔직하며, 북방 지역의 구어나 방언은 물론이고 오랑캐의 언어까지도 섞어 썼고, 내용 또한 현실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대부분 북방 사람들이었는데, 관한경(關漢卿)·마치원(馬致遠)·백박(白樸)·왕실보(王實甫) 등 이른바 원곡사대가(元曲四大家) 같은 작가들이 모여 빼어난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원나라가 통일된 이후인 후기에는 고위 관료들이 산곡을 짓기 시작하면서 우아하고 정리된 형식의 글을 짓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는 글의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원곡(元曲)이 문장을 가다듬어 아름다워진 이면에 그 표현이 부자연스러워 생기를 잃게 되었다는 반대의 의견이 충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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